시마다 마사히코 - 은퇴한 프로 마조히스트를 회고하며

yuka honda - how many times can we burn this bridge?
 
근래에 시마다 마사히코의 '나는 모조인간'과 '몽유왕국을 위한 음악'을 연달아 읽었습니다. '나는 모조인간'은 이전에 악마를 위하여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었고 마지막 부분에서 자살한 중년남자 에피소드가 등장하고나서야 제가 그전에 '악마를 위하여'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었음을 눈치챘습니다. 그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희한하리만큼 별 존재감이 없었던거지요. 제가 그의 작품 중 제일 좋아하는 아니 전혀 과장되지 않은 말로 제 삶의 태도를 결정지은 그래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천국이 내려오다'에는 작품만큼이나 환타스틱한 작가 후기가 있습니다. 거기에 '나는 모조인간'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요. 잠시 옮겨보겠습니다.

- 내가 이 작품에 착수한 것은 1984년 10월이었습니다. 그 전후에 '나는 모조인간'이란 작품을 썼습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가장 평가가 높았고, 나도 회심작이라고 공언하기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이 성공에 흥분한 나는 이쯤에서 대 실패작을 남겨두리라 생각했습니다. 비평가나 신처럼 위대한 대작가(신은 19세기가 끝날 무렵에 죽었다고 하는데)에게 칭찬을 받으며 각각의 진영에 끌려들어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또 독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는 마조히스트라서, 그들의 비판의 칼날에 난도질 당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악평이 65퍼센트 정도였습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비판의 칼날이 무뎌, 난도질당하는 쾌감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들은 내가 보여준 속임수의 트릭을 간파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 그러니까 저는 그의 성공작보다는 그가 작정하고 만든 실패작을 더 좋아하는 셈입니다. 프로 마조히스트가 되기로 결심한 그에게는 이쪽이 더 잘 어울린달까요. 솔직히 '나는 모조인간'의 결말 부분에서 아쿠마 카즈히도가 진지하게 클라이밍을 할때는 그 진지함 때문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은 작가후기에 등장하는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제발, 여러분, 나의 작품 이외의 별볼일 없는 작품은 읽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세계의 명작과 나의 작품이 있으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마포도서관에는 책이 없어 성남에 잠시 들렀을때, 대출증이 없어 열람실에서 반쯤 읽었던 '몽유왕국을 위한 음악'을 오늘 다 읽었습니다. 시마다 마사히코의 작품 간행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1983 부드러운 좌익을 위한 회유곡
1984 망명 여행자는 외치고 중얼거린다
몽유 왕국을 위한 음악
1985 나는 모조인간
1986 돈나 안나
미확인 미행물체
1989 꿈의 사자
1990 피안선생
1995 잊혀진 제국
떠오르는 여자, 가라앉는 남자
1996 피안선생의 침실 철학

'부드러운 좌익을 위한 회유곡'과 '나는 모조인간'은 국내에서 '악마를 위하여'로 출간되었고, 이 중 '나는 모조인간'만 최근에 다시 간행되었습니다. 국내에서 발간된 '몽유 왕국을 위한 음악'에는 '몽유 왕국을 위한 음악'과 '천의 얼굴, 스피카' 와 '스승 팬만'인가 하는 작품이 포함되어있습니다. '돈나 안나'는 시기로 보았을때 '천국이 내려오다'인것 같고, 잊혀진 제국은 '로코코 거리'인 듶 싶습니다. '피안선생의 침실 철학'은 '퇴폐예찬'으로 추측되고. 그러니까 오늘로서 저는 국내에서 출간된건 '미확인 미행물체'를 제외하고 다 구입하거나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보았습니다. '악마를 위하여'에 포함된 '부드러운 좌익을 위한 회유곡'은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할 듯 싶지만. 그를 통해 얻은 결론은 저는 그의 초기작엔 크게 흥미가 없으며 그의 중기작은 미친듯이 좋아하고, 그의 후기작은 그의 네임밸류에 비해선 대단치 않다고 생각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이기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작가의 최고작보다는 더 좋아한다는 얘기입니다. 왜 저는 그의 중기 작품에는 열광하면서 그의 초기작은 크게 흥미가 없을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다 문득 3년전 이맘때 쯤에 다리아 관련 다음카페에 쓴 글이 생각났습니다. 그 글은 이 포스트 맨 아래에 옮기겠습니다. 우선 정리하자면 제가 시마다 마사히코의 작품을 좋아하는건 그의 작품에 '제가 매혹될 수 밖에 없는 여인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은 팜므파탈이기도 하면서 모성애를 요구하고 싶게 만들기도 하고, 곁에 있으면서도 없는 듯 하며, 제게 삶의 비밀을 알려줄 듯 하다가 스스로 비밀이 되어버리는 그런 여인들입니다. 반면 그의 초기작에 등장하는 여인들 혹은 소녀들은 너무 미숙합니다. 남자를 유혹하기는 커녕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과연 알고나 있을까, 의문이 드는 캐릭터들 투성입니다.

잠시 정리를 하자면
'천의 얼굴, 스피카'에 등장하는 스피카 - 어른들을 위한 바비인형 혹은 원조교제를 위한 스쿨걸, 거기에는 매혹도 끌림도 없다. 그저 자기과시를 위한 우스꽝스러운 제스쳐의 소비욕만이 있을 뿐.
'나는 모조인간의' 지즈루 - 인격이 없는 존재,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tv같은 '아, 그래 오늘은 연속극을 하기로 한 날이었지' 중얼거리며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몽유왕국을 위한 음악'의 마주루카 - 이름은 그의 작품 중 가장 매혹적이지만 그저 끌려다니고 있을 뿐이다.
'스승 팬만?' - 에는 여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다.

확실히 시마다 마사히코의 초기작에서 그는 미숙한 마조히스트입니다. 아직 마조히즘의 쾌감을 약간 맛보고 그 쾌감을 자신의 태도로 정했을 뿐이지요. 그런만큼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그녀들 역시 미숙한 새디스트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다 그는 '천국이 내려오다'를 통해 본격적으로 프로 마조히스트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마조히스트는 프로로서의 데뷔를 결심했을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쾌감의 미학이 절정에 달했을때지요. 그 후 그는 원숙한 마조히스트 - '드림 메신저'와 '피안 선생의 사랑'의 길을 걷다가 '떠오르는 여자, 가라앉는 남자'에서는 결국 노쇠해버립니다. 마조히스트로서의 쾌감의 유효기간은 거기까지였던 거지요. 그리고 지금 시마다 마사히코는 더이상 작품을 집필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그의 모습이 볼 수 있던건 소설이 아닌 2001년도에 공개된 오쿠다 에이지 감독의 영화 '소녀'이고, 지금은 청년때의 곱디고운 외모는 다 사라지고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어 오페라 연출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이제 프로 마조히스트에서 은퇴해버린걸까요. 그의 작품을 더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매우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쾌감의 유효기간을 어긴채 이제는 임포텐츠에 걸려버린 마조히스트보다는 그냥 섹스홀릭 혹은 정키에 가까운 무라카미 류의 경우를 볼때 말이예요. 저 역시 더이상 '후생에는 그가 백마흔두번째 여자와의 관계를 가질 때 빠져버릴 음모로 태어나도 좋을것 같은 기분'은 (아래 글 참고) 들지 않습니다. 저도 이제는 나이를 먹었거든요. 시간이란 그런겁니다. 저는 더이상 한때는 삶의 전부인 것 같았던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여전히 이룰 수 없는 꿈에 홀려있지만 그것을 이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예전처럼 무모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래 글을 썼을때 그곳에서 만나 매일마다 함께 술을 마셨던 사람들은 더이상 그전처럼 매일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며, 이전처럼 한데 모이기 또한 그리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뭐라 얘기하면 좋을까요. 낡을수록 빛을 더하는 앤티크 가구처럼 우리 역시 성장하고 있는거라고 얘기하면 좋을까요. 아니면 우리는 그때와 같은 미숙하지만 순수한 열정을 잃어버린 사회화된 광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얘기하는게 좋을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은 유보하겠습니다. 대신 3년전 썼던 시마다 마사히코에 관한 글을 아래에 옮깁니다.



대문에 걸려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시마다 마사히코의 '꿈의 메신저'에 등장하는 페넬로피가 떠올랐습니다. 가타기리의 렌틀차일드 사업의 자본으로 쓰이던 무렵 자신의 방에서 매튜에게 유혹과 경계, 두가지 수단을 능숙하게 동시에 쓰던 그녀의 모습 말이예요. 특히 니플의 모습이 그녀를 떠올리게 합니다. 욕망의 경계 사이를 유유히 넘나드는 작고 아담한 사랑스러운 니플.

우물은 시마다 마사히코의 '천국이 내려오다'에 대해 '내 취향이 아닌것 같다'라는 평을 내렸지만, 나는 시마다 마사히코가 너무 좋습니다. 후생에는 그가 백마흔두번째 여자와의 관계를 가질 때 빠져버릴 음모로 태어나도 좋을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대부분의 좋아하는 것을 즐길때처럼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한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불행히도 딱지를 떼내듯 언제나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언젠가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에 관한 리스트를 만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의 대부분은 타인을 납득시킬 수 없다고 생각되었고 그래서 나는 그 리스트를 타인을 납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것과 납득시킬 수 없는것으로 분류하였습니다. 납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 리스트에 분류된 것은 유일했는데 그것은 '내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여인이 등장한다'라는 것입니다. 아, 정말 그것은 '사랑할 수 밖에 없는'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빛이 없는 곳에 사는 외계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그림자와 같은 떼어내려고 해도 떼어낼 수 없는 강하게 밀착된 질기고 단단한 무언가를 지니고 살아가는데 나에게는 시마다 마사히코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에 대한 내 감정이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숙명이고 계시이고 덫인 것입니다.

시마다 마사히코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도 역시 그녀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녀석들입니다. 나는 주인공들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주인공들과 그녀들의 관계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 그녀들과의 관계에서 온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정이라는 것이 순수한 대상에서 자연스레 생기기는 것이라기보다 나와 대상을 이루고 있는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매우 불확실한 것이지만, 그리고 믿음과 불확신이라는 단어는 모순되는 것이지만, 물론 관계라는 것은 분열을 거듭하는 아메바처럼 끊임없이 변주되는 것이고 그래서나는 내가 가진 감정들을 사생아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미안합니다. 그래서 나는 작년 가을 내가 구입한 16인치 미니벨로 자전거에 천국이 내려오다에 등장하는 묘코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그녀 앞에서 마리오가 되었습니다. 소설속에서의 마리오와 묘코와 달리 내가 만들어낸 현실속의 마리오는 묘코 위에 올라 탔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통쾌한 전복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불과 한달만에 나는 더이상 묘코위에 올라 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쯤 묘코를 아마 다른 누군가의 엉덩이 아래에 있겠지요. 그리고 마리오를 놀리던 때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을 겁니다. 마리오, 너의 장난은 실패했어, 좀 더 재밌는 장난을 보여줘봐, 라면서. 그것은 내게 어떠한 계시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지금 나는 '꿈의 메신저'를 읽고 있습니다. 스무 페이지 정도를 넘기면 책은 닫힐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페넬로피를 그리워하며 잠이 들겠지요. 나도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한 매튜처럼 그녀의 꿈속에 방문할 것입니다.

그녀의 꿈속에서
나는


'페넬로피, 마지막 이별을 고하러 왔어. 나는 죽을거야.
사랑을 보상받지 못하는 인간은 죽어야 마땅해.'
라고 말한 뒤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죽어.

by loceleb | 2006/06/02 22:27 | 밤이 듣는다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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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oceleb at 2006/06/03 02:27
이 포스트를 올리고나서 시마다 마사히코 관련 자료를 찾다가 '망명여행자는 외치고 중얼거린다'를 텍스트 화일로 구했습니다. 역시 네트워크는 광대하고 위대합니다. 정말. 흑.
Commented by krush at 2006/06/04 13:56
광대하고 위대하죠. 그리고 위험하죠 네트워크는. 얼마전부터 그 위험성이 느껴지는 중입니다.
Commented by yeah at 2006/06/04 20:47
안녕하세요~
아주 흥미로운데요? 이런 작품을 쓰는 작가도 있군요.
찬찬히 좀 읽어봐야 겠습니다.
Commented by loceleb at 2006/06/05 14:23
추천작은 천국이 내려오다,와 피안선생의 사랑입니다. 다만 문제는 저 작품들의 강도가 워낙 세서 저 작품을 먼저 읽은 뒤 다른 작품을 읽으면 상대적으로 시시하게 느껴진다는거지요.
Commented by 이든 at 2006/06/05 22:16
사랑을 보장받지 못하는 인간은 죽어야 마땅해 <- 극단적인 말임에도 왜 이렇게 설득력있는건지.
Commented by 서동요 at 2007/05/01 00:34
시마다 마사히코의 무한캐논 시리즈 추천합니다. 지금 1부 읽고 있는데... 정신 쏙 빠질 정도로 제미있습니다. 뭐랄까 웅대하고 장대하고 귀족적이고 약간은 침울한... 사랑 얘기랄까... 아무튼 시마다 마사히코 무한캐논 덩말 대작은 대작입니다.
Commented by at 2007/05/02 21:00
한국어판으로 2007년 5월중에 출판된답니다. 이미 번역 다 끝났고 시기를 기다리는 것 같네요.
Commented by 멸치 at 2007/05/03 01:39
헉...릴리스 예고 이미지가 나왔을 뿐인데 벌써 읽고 계신건가요? 아직 교보문고에 안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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